-데카르트주의
데카르트 주의(Cartesianism)란 르네 데카르트가 제안한 철학적·과학적 사상 및 그 사상을 발전 및 계승하려는 17세기의 사상가들이 가졌던 사상을 말한다. 주요 학자로는 스피노자, 니콜라 말브랑슈 및 바뤼흐가 있다.
데카르트는 마음이란 전적으로 육체적인 몸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았다. 신체적 감각 및 실제에 대한 인식은 때로 오류와 착각, 환상의 원인이 될 수 있으나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형이상학적인 정신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정신은 물질적인 정신과 상호작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몸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몸과 같이 공간 속의 질료로써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 하는 질문은 데카르트나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끊임없는 난관이었으며 데카르트 주의자로 여겨지는 학자들마다 다른 답을 내놓았다. 데카르트는 흔히 자연과학의 발전을 위해 이성을 사용할 것을 강조한 최초의 사상가로 여겨진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철학이란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사고 체계이자, 그러한 사고 체계에 입각해 지식을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칸트주의
칸트주의(Kantianism)는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기반을 둔 철학 학파이다.
칸트는 자연이 합당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은 자연의 최종적 목적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의 존재에는 의도가 있으며 거꾸로 인간의 행동은 자연의 합당한 목적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당위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주의 윤리학은 동기나 최종 목표보다는 주체를 둘러싼 의무들을 강조하는 의무론적 윤리학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모든 행위는 서로 근원적으로 다른 기본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어떠한 행위의 도덕성이 판별된다. 이런 관점에서 칸트주의 윤리학은 규범 주의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주의
오늘날 스피노자는 18세기 계몽주의와 근대 성서 비판의 토대를 놓은 유럽 17세기 철학의 합리주의자 세 거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대작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정초주의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정신-육체 이원론에는 반대하였으며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자로 손꼽힌다. 헤겔은 모든 근대 철학자에 대해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힘)를 언급한다. 에피쿠로스의 용어로 보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살고자 하는 욕구 혹은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의 완전한 표출을 행복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코나투스를 발휘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최고라고 보았다. 또한 스피노자는 신은 존재하며,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관점은 Charles Hartshorne이 고전적 범신론이라고 설명하였다. 스피노자는 특히 그와는 반대 입장인 데카르트의 육체-정신 이원론과 관련되어 "에피쿠로스주의적 유물론자"로 설명되었으나 에피쿠로스주의자는 현대의 양자 역학에 대한 사상의 선상에서 확률적인 경로를 갖는 원자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하였고, 스피노자는 유물론자인 동시에 의식의 일련의 상승화를 긍정하여 물질성(정열)과 의식성(방법적 회의에 기초한 치밀한 사유)을 구분하였으므로 에피쿠르스주의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의 논증은 스토아학파와 비슷하며, 현대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현대에 부활한 스토아학파 사상의 연장선으로 취급된다. 스피노자의 체계는 "인정된 권위"에 저항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하여 급진적 사상에 질서와 통합을 부여하였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실체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또한 우리가 그 일부인 실체를 통솔하는 질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같은 실체의 두 가지 이름으로 보았다. 또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연, 신, 그리고 단 하나뿐인 실체는 같은 개념이다. 무한자는 '능산적 자연'(산출하는 자연)으로써,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힘이다. 이에 대비되는 유한자는 '소산적 자연'(산출된 자연)이다. 이 두 자연은 힘을 가진다.
-헤겔주의
헤겔주의는 1830년대를 중심으로,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 헤겔에게 직접 사사 혹은 다대하게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이 유파를 이어받고 철학을 전개한 사람들의 일로이다. 헤겔의 사후, 1835년에 헤겔주의 신학자 다피트 스트라우스에 의해서 쓰여진 '예수의 생애'의 견해에 의해서 헤겔주의가 분열했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에서 주장된 것과 같은 기독교의 해석을 인정하는 것이 좌파 (청년 헤겔파),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앙파, 부정하는 것이 우파(우 헤겔주의)로 구분했다. 이 시기, 헤겔주의에 속하고 있던 학자는 70명 이상에 달했다. 덧붙여 파벌의 구분은 반드시 엄밀한 것이 아니고 파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물은 것이었다. 이후 주도적으로 된 것은 청년 헤겔파이며, 젊은 마르크스도 여기에 일원이 되고 있었다. 그 후 우파는 충실히 헤겔의 저작 간행, 학설의 해설 등에 노력했지만, '죽어가는 개'가 되고 있는 헤겔의 철학을 고집해, 정치적으로도 시대의 궤도에 오르는 것이 늦었다. 또 중앙파는 이후 헤겔의 생각에 준거하고, 철학사의 편찬에 종사했다. 이와 같이 분열 후, 여러 가지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우파, 중앙파는 그 후 맥들 헤겔의 철학의 전승에 의무 19세기 후반의 제2그룹에 계승하였다.
철학, 심리학